교육 비평

영어와 혹세무민

OnionJ 2008. 3. 15. 10:46
돈내면 천국간다, 하늘이 뜻이니 교주에게 몸바쳐라, 이 약은 만병통치약이니 낫지 않는 병이 없다... 이런 것들을 혹세무민이라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대중은 항상 혹세무민에 노출되어 있고 취약하다. 혹세무민은 항상 사회적 위기나 공포심을 배경으로 하고 잔머리가 뛰어난 이들이 치밀하게 기획하고 준비한 반면, 대중은 순진하고 연약하고,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사고 훈련이 부족하며, 대체로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양심적인 지식인이나 착한 정부가 대중의 편에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불고 있는 영어 광풍도 혹세무민이 분명해 보인다. 왜 그런가?

혹세무민 1 - 모두가 영어를 잘 할 수 있다?
영어를 모국어나 공용어로 사용하는 나라조차도 모든 사람이 영어를 잘 하는 경우는 없다. 영어와 구조가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들의 경우도 우리보다는 낫겠지만 모두 영어를 잘 하는 것은 아니다. 영어 잘 하는 나라로 인도의 예를 많이 들지만, 인도는 오랜 기간 영국의 식민지였고 18개의 공식 언어를 사용하는 상황에서 영어가 매우 중요한 언어임에도 실제로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은 불과 5%미만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영어를 아예 할 줄도 모르며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 중 다수도 사실 택시 기사 등의 필요에 의해 밥벌이하는 수준의 영어를 구사할 뿐이다. 우리나라와 교역이나 사업적 협의를 위해 온 사람들이야 당연히 영어를 잘 하는 사람들일텐데, 그들을 보고 인도사람들은 모두 영어를 잘 한다고 말하는 것은 침소봉대이며 빙산을 일각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누구나 영어를 잘 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 놓고 그것을 통해 사교육 시장을 늘리거나 영어를 경쟁의 기제로 삼으려는 이들의 의도적인 혹세무민으로 판단하는 것이 더 타당할 듯 하다.
모두가 영어를 잘 할 수도 없고 잘 할 필요도 없다. 그런 사회는 정말 비효율적이고 경쟁력이 없는 사회다. 과학이나 문학에 특출난 재능과 취향을 가진 사람이 있듯 영어도 적성에 맞고 재능이 있거나 특별히 흥미를 갖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보다 전문적으로 영어를 잘해서 전체 사회를 위해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모두 영어를 잘하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적게나마 시간을 빼앗기며 자기 영역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것보단 수백배 낫다.

혹세무민 2 - 10년 영어공부하고도 영어 한 마디 못한다?
이 말은 공교육을 흔들고 그 무용론을 주장할 때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혹세무민이다. 사실 공교육에서는 영어를 10년동안 1천시간 정도, 즉 1주일에 1-2시간 띄엄띄엄 받는다고 해야 정확하다. 이 정도로는 아무리 천재라도 영어를 잘 할 수 없다. 많은 연구 결과들이 영어를 어느 정도 하려면 집중적으로 5천시간 정도를 학습해야 한다고 한다. 그나마 영어가 입시에서 비중이 매우 높아서 입시 위주로 가르치는 것을 피할 수 없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차라리 공교육 현장에서는 듣기 말하기를 중심으로 수업이 진행되지만 사교육 현장으로 가면 99%가 철저한 입시위주의 문제풀이식 주입식 영어수업 일색이다. 일상 생활에서 영어가 별로 필요 없는 상황인 것까지 감안하면 우리가 영어를 못 한다거나 아주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수업했다고 쉽게 인정할 수 없게 된다.
영어 한 마디 못하는 것은 영어를 정말 못해서, 영어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평소 자연스럽게 영어를 사용하는 상황에 노출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한계는 외국인을 만나 사용할 필요가 있고 그 속에서 자꾸 사용하게 되면 저절로 금방 극복된다.
영어 한 마디 못하는 또다른 이유는 영어를 사용하는데 지나치게 정확성을 요구하는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사람끼리 있을 때 영어를 더 잘 못하고 외국인 앞에서 영어를 더 스스럼없이 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어 한마디를 잘 하게 하려면 입시제도를 바꾸고, 학생들이 스스로 영어를 여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야 하며, 즐겁고 흥미롭게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구조를 만드는데 힘을 전혀 쏟지 않고 공교육의 교사들을 모욕하고 공교육 흔들기를 일삼는 것은 상황을 최대한 악화시켜 사교육의 배를 불리려는 의도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혹세무민 3 - 영어가 경쟁력이니 온 국민이 영어를 잘 해야 한다?
영어가 경쟁력이라는 명제가 성립하려면 영어 못하는 나라는 못 살고 영어 잘 하는 나라는 잘 살아야 한다. 과연 그런가? 영어 못해도 잘 사는 나람 많고(일본), 영어 잘해도 못 사는 나라 많다.(인도, 필리핀, 자마이카, 가나, 나이지리아, 남아공, 우간다, 짐바브웨, 카메룬, 케냐, ...) 우리나라도 영어 못 하지만 세계적으로 선진국에 속하고, 만약 우리나라보다 못 사는 나라 중에서 영어 잘 하는 나라를 찾아 보면 훨씬 많다. 영어와 경쟁력은 상관관계가 없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영어 잘 하는 나라들도 영어 잘 하는 사람의 비중이 의외로 높지 않다.
국제회의나 관광이 주요 수입원이라면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의 경우처럼 상품 수출이 중요하다면 과학, 문화 등의 컨텐츠가 제일 중요한 경쟁력이다. 영어는 정말 필요한 사람 위주로 전문 통역사와 번역사를 대거 집중 양산하면 된다. 어줍잖은 영어로 직접 외교, 협상, 판촉, 계약 등을 하면서 손해 볼 것이 아니라 정확하고 자신감 있는 통역사를 대동하여 결코 손해보지 않는 성과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

혹세무민 4 - 공교육은 사교육을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
공교육과 사교육은 대상, 목적 등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대상과 목적이 다른 것을 입시 등 사교육이 추구하는 목적을 기준으로 비교하면서 공교육은 사교육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혹세무민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그들이 일정하게 갖춰야할 민주시민으로서의 교양과 가치와 지식을 키우는 것이 공교육이라면 사교육은 공교육에서 수용할 수 있는 개인적 취미, 능력 개발, 선택적 보충 등을 목적으로 원하는 사람이 자비를 내고 받는 교육이다.
공교육은 입시를 위한 기관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되지만, 사교육 역시 건전한 사회라면 지금과 같이 입시 위주로 흘러가서는 안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국가의 일정한 개입이 필요하다. 입시 제도의 근본적 개선 노력과 더불어 입시 중심의 사교육, 선행 학습 중심의 사교육을 금지하고 단속하는 노력이 동시에 필요하다. 현재 사교육의 자정 능력이 이미 상실되었고 오히려 공교육 왜곡의 주범으로 권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입시 위주의 문제풀이식 강의나 선행학습은 단기적인 효과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장기적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큰 해악이 된다. 스스로 공부하는 자주성과 문제해결력이 상실되며 창의성과 협동성은 물론 민주시민으로서의 도덕 개념과 자아감도 배양할 수 없다.
학습 효과로 보더라도 가장 성취도가 낮은 강의식이나 고작해야 멀티미디어의 활용에 머무르는 사교육보다는 Learning by Doing, Learning by Discussion, Learning by Teaching이 훨씬 학습 효과가 높고 오래 간다. 경제력이 되고 일정 수준에 오른 학생들이 선택적으로 가는 사교육이 경쟁력이 높다는 것은 마치 특목고가 일반고보다 진학률이 높다는 것과 같은 혹세무민이다. 중학교 성적을 기준으로 할 때 특목고보다는 일반고 학생들이 더 나은 진학률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회화능력을 거론하면서 공교육이 사교육에 떨어진다고 혹세무민하는데, 도데체 그 근거를 알 수가 없다. 공교육의 영어교육은 지난 90년대 경 도입된 6차교육과정 이래로 이미 듣기말하기 중심의 교과서로 진행되고 있으며 교사에 따라 편차는 있지만 여러가지 다양한 활동과 과업 중심의 의사소통능력 향상을 위한 수업이 진행되고 있고, 교사들의 영어로 매개하는 수업과 영어 사용도 갈수록 늘고 있다. 반면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를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각종 영어 사교육의 거의 대부분은 문법과 입시 위주의 문제풀이식 강의가 대부분이다. 현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사교육에서는 회화 중심으로 수업이 이루어지고 공교육에서는 여전히 70년대식 문법수업이 주가 된다고 혹세무민하는 것은 결국 사교육 시장을 부풀리고 거기서 떡고물을 얻으려는 자들의 술수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사들이 사교육 강사들보다 능력이 떨어져서 입시 위주의 교육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공교육의 사회적 목표, 장기적 관점, 교육자적 소신과 전문성은 결코 그런 수업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혹세무민 5 - 방과후 학교, 영어마을, EBS 등이 공교육 강화다?
공교육의 도대체 무엇을 보완한다는 것인지 불분명하게 도입된 각종 인프라들이 사실은 정치적 혹세무민이며 예산 낭비임이 분명히 지적되어야 한다. 방과후 학교는 사교육 기관에서 해야 할 일을 무분별하게 공교육 현장에 끌어들이면서 공교육 교사들의 엄청난 잡무 및 시수 증가를 초래하여 학교 수업의 질을 떨어뜨리는데 기여하고 있으며, 그나마 입시 위주의 문제풀이나 선행학습 등 공교육에서 결코 해서는 안될 일들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은 영어마을은 그 수혜를 보는 학생들이 드물고 효과도 없을 뿐만 아니라 매년 엄청난 적자를 내는 애물단지가 되었고 지금은 사교육기관에 대책없이 넘겨지고 있다. EBS 방송은 방송의 공익적 측면이나 최소한의 자존심도 팽개친 지 오래로 학원에서나 진행될 약장사식 수업으로 교육에 소신을 가진 교사들을 모욕하고 전 국민의 수준을 떨어뜨리는데 기여하고 있다.(국가에서 이런 약장사식 교육을 위해 방송사를 설립하고 무차별 송출한다는 것이 세계적으로 또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반면 학교는 과밀 교실, 행정 중심 체제, 낙후된 시설 등으로 사회 발전에 비해 교육환경이 갈수록 오히려 악화되는 현상이 진행되고 있다. 결국 공교육 개선을 위해 매우 유용하게 쓰여서 온 국민에게 고루 혜택이 수십년, 수백년 돌아갈 수 있는 귀중한 예산이 정말 엉뚱하게 사교육을 배불리거나 공교육을 왜곡하고 방해하는데 쓰이고 있는 것이다. 방과후 학교, 영어마을, EBS 등의 전시행정식 무원칙 운영은 물론 이들을 도입한 이들은 일정하게 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며, 앞으로도 공교육의 근본적인 개선에 투여되어야 할 예산이 전시행정적 보여주기 예산 낭비로 귀결되는 일이 없도록 온 국민의 감시와 견제가 살아 있어야 할 것이다.

영어 못 하면 진학도 취업도 승진도 못한다는 협박과 그것을 확산 수용하는 시스템, 그 시스템에 휩쓸린 대다수 대중은 몸버리고 돈버리고 시간버릴 뿐 소외되고 손해보는 상황의 심화, 게다가 그것을 통제하고 제거해야 할 정부가 오히려 깃발 들고 앞장서고 언론이 직접 사업에 뛰어들고 펜의 힘으로 부추기는 등 이 혹세무민은 브레이크 없이 우리 사회를 유린하고 있다.
'논리성이 결여된 정신적 병자의 지배,' '도덕 개념이 결여된 천민자본의 지배'가 계속되는 한 저절로는 극복되지 않고 우리 사회의 파탄까지 질주할 뿐이다. 그 가장 큰 피해자는 결국 누가 될까?

영어 혹세무민은 아무런 이유없이 온 국민에게 경쟁적으로 탑에 오르게 하지만 그 탑 꼭대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 정부는 탑을 올라야 한다고 하고, 언론은 다른 나라도 다 탑에 오른다고 하고, 일부 지식인과 사교육은 자기들이 파는 도구가 탑을 오르는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자랑한다. 대중은 갑자기 주변에서 탑을 향해 하나둘 달리는 것을 보면서 앞뒤 안가리고 경주에 뛰어들고 몸팔고 집팔아 도구를 사고, 사교육과 언론은 도구를 팔아 배를 불리고 정치인과 정부는 표와 떡고물을 얻어 착복한다. 산에 올라서 탑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사람이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