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를 남편이 해야 할 이유
맞벌이를 하다보니 가사 분담하는 일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설거지도 그 중 한 가지다.
신혼 초에는 화려한 자취 경력을 내세우며 요리의 반 이상을 내가 하다보니 아내가 설거지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큰 불만이 없었다. 그런데 갈수록 외부 활동이 많아지면서 늦게 들어오는 날이 늘게 되니 집안일이 차츰 아내에게 몰리게 되었다. 내 가사 분담이 요리보다 설거지쪽으로 이동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여전히 아내가 버거워하는 대형요리(?) 가끔 하는 것으로 남편의 체면과 권위를 어렵사리 유지해 나갔다.
사실은 그 설거지조차도 가뭄에 콩나듯이 하다보니 직장일에 집안일에 바쁘기는 매한가지인 아내 입장에서 불만이 높아지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설거지때문에 싸운 일은 정말 셀 수 없이 많다.
첫 아파트를 분양 받아 이사갈 때 정말 큰 돈을 들여 당시 가장 비싼 식기세척기를 샀더니 한동안 설거지 문제로 티격태격하지 않게 되었다. 주변의 맞벌이 부부에게 식기세척기로 가정의 평화를 찾자고 역설하고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이 식기 세척기도 많은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선 찌꺼기가 많이 묻어 있거나 약간 마른 경우 식기 세척기에 그릇들을 넣기 전에 초벌 설거지를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식기를 채곡채곡 잘 채워 넣어야 한다는 것 등이 그냥 설거지 하는 것 이상의 시간과 노력을 요구했다. 큰 그릇은 들어가지도 않고, 오목한 그릇은 내부가 잘 씻기지 않았다. 전기, 온수 사용으로 인한 가스 등이 상당량 추가로 소비되고 전용 세제 구입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결정적인 것은, 식기들이 손으로 설거지할 때와 달리 깔끔 투명하게 닦아지지 않고 흐릿한 잔류물이 쌓여가면서 식기 표면이 윤기를 잃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결국 음식물 찌꺼기나 세제 찌꺼기가 얇은 막을 형성한 채로 남아 건조되면서 조금씩 두텁게 쌓여간 것이다. 나중에 이것을 뜨거운 물에 불려 쇠수세미로 닦아내고 나서야 식기의 원래 윤기를 찾을 수 있었다.
식기 세척기를 사용하는 것이 손으로 하는 설거지보다 훨씬 불편하고 덜 개운하니 자연스럽게 식기 세척기를 사용하지 않게 되고, 결국 냉전은 다시 시작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식기 세척기가 우리의 가사노동을 실제로 줄여 주었다기보다 그런 느낌을 갖게 했을 뿐이라는 것이 보다 정확한 것 같다.
요즘은 식기 세척기가 기술적으로 더 좋아졌다고들 하나 위에 나열한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없어지진 않을 것이다. 이런 저런 고민 끝에 새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식기 세척기를 재활용 센터에 기증해 버리고 초음파 식기세척기를 샀다. 현재까지 눌러붙은 찌꺼기를 불려 미리 대충 제거해야 하는 점을 빼고는 여러가지 면에서 매우 만족스럽다. 초음파 식기 세척기 통에 그릇을 대충 채워 넣고 물을 받고 기름기가 많을 경우 세제를 약간 떨어뜨려 세척 버튼을 누르면 되니 이전 식기 세척기보다는 훨씬 일이 줄었다. 특히 그릇 표면이나 보이지 않는 틈새에 낀 미세한 오물들이 초음파를 통해 제거되면서 사기그릇이나 쇠그릇은 물론 플라스틱 그릇들까지 깔끔하게 윤기를 되찾아 갔다. 가스비는 전혀 들지 않고 물, 전기, 세제 등은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적게 들었다. 게다가 과일이나 야채 등을 씻을 때도 살균은 물론 표면이나 보이지 않거나 손이 닿지 않는 틈새에 낀 오물과 잔류 농약까지 제거해 주니 참으로 고맙다고 아니할 수 없다.
최근에는 설거지용 세제를 아예 사용하지 않고 있는데, 바로 아크릴사로 짠 행주(온라인 쇼핑몰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다.) 덕분이다. 털실이라고 알고 있는 아크릴사는 그 성질상 그릇 등에 묻은 기름기를 세제없이 제거하는데 탁월한 기능을 발휘한다. 실제로 설거지를 해보니 사기그릇이나 유리, 스테인레스 그릇 등은 세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아도 기름까지 100% 제거되어 뽀득뽀득하게 닦였다. 물을 조금씩 흘려가며 그릇을 아크릴사 행주로 바로 닦아 물빼는 바구니에 올리면 되니, 세제를 묻혀 닦고 다시 여러번 헹구고도 세제가 남아 있을까봐 찝찝했던 기존의 손 설거지 방식에 비하면 시간과 노력이 엄청 감소된 것이 분명하다.
시간과 노력을 줄이면서 깔쌈한 설거지를 할 수 있게 된 우리집 설거지 과정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1. 그릇을 설거지 통에 넣고 물을 뿌려 불린 다음, 그릇에 물을 조금씩 흘리면서 아크릴사 행주로 세제 없이 닦아 물빼는 바구니에 차곡차곡 올려 놓는다.
2. 살균이나 플라스틱 그릇 등의 틈새 오물 제거나 그릇의 표면 미세막 제거가 필요한 경우 초음파 세척기를 가끔씩 사용한다.
요즘은 씽크대 설거지통 자체에 초음파 세척 기능을 내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게 하면 초음파 세척기를 옮기는 수고나 초음파 세척기가 차지하는 공간 때문에 씽크대 공간이 줄어드는 불편까지 없앨 수 있다.
세제 없이 아크릴사로만 설거지를 하는 경우 아무래도 손에 힘을 주어 빠득빠득 닦아야 하므로 손 힘이 약한 여자들이 하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다. 실제로 아내가 설거지를 하다가 손에 힘이 빠져서 아까운 그릇이 깨지는 경우도 있었고, 설거지 후 손에 힘이 하나도 없다고 하소연하는 경우도 있었다. 단순한 느낌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설거지를 한 경우 아내가 한 경우보다 훨씬 투명하고 윤기나는 깨끗한 그릇이 되었다. 남편들이 설거지를 해야 할 이유가 아닐까? 물론 이것 말고도 이유는 참 많다.
남편이 설거지를 맡으면 가정이 화목해지고, 보다 깨끗하고 위생적인 그릇을 사용할 수 있으며, 에너지를 절약하고 환경을 보호할 수 있다. 아내가 들이는 시간과 노력보다 훨씬 적은 시간과 노력으로 설거지를 마칠 수 있다.
남편들이여, 오늘 당장 어떻게 설거지를 할지 연구하고 실천해보자. 나라와 가정을 위해... 아니,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